마태복음 소개
시대적 배경
마태복음은 전통적 견해에 따르면 A.D. 50년대 후반에서 70년 이전에 안디옥에서 기록되었습니다. 당시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가 여전히 형성 과정에 있었고, 바울의 이방인 선교가 본격화되면서 교회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포함하는 공동체로 확장되어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도 확산되고 있었습니다.
반면 현대 학계에서는 A.D. 80-90년경 시리아 안디옥 지역에서 기록되었다고 봅니다. 이 시기는 성전 파괴 이후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고, 유대인들이 정체성의 위기를 겪으면서 교회가 점차 이방인 중심으로 변화하던 때로, 당시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 선교의 거점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다문화적 환경에서 복음의 보편성을 증명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두 견해 모두 안디옥을 기록 장소로 보는데, 이곳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어우러진 초기 기독교의 중요한 중심지였으며,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렸던 곳입니다(행 11:25-26).
-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통일 이스라엘 왕국 시절 솔로몬이 건축했던 제1성전(대하 3-4장)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왕하 25:8-9). 바벨론 포로 귀환 후 스룹바벨이 솔로몬 성전보다는 규모가 작은 제2성전을 재건하였고(스 5-6장), 이것을 헤롯 대왕이 더욱 웅장하게 재건축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존재했던 성전이 바로 이 제2성전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시절 이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셨는데(마 24:1-2), 이는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A.D. 66년에 유대인들의 로마에 대한 반란으로 인해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이 촉발되었고, 로마군은 70년에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제2성전을 완전히 파괴했습니다.
이 사건은 유대교 역사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한 제사 제도가 완전히 중단되었고, 제사장 계급이 사실상 해체되었으며, 유대인들은 전 세계로 흩어지는 대규모 디아스포라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초기 기독교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예루살렘 중심의 유대 기독교가 쇠퇴하면서 이방인 기독교가 주류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파괴는 복음서 연대 측정에 중요한 기준점이 되는데, 성전 파괴에 대한 언급이 예언적인지 역사적 회고인지에 따라 각 복음서의 기록 연대를 추정하는 근거가 됩니다.
저자와 기록 목적
마태는 가버나움에서 세리로 일하던 레위였으며,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제자가 된 열두 사도 중 하나입니다(마 9:9). 세리라는 직업 특성상 계산과 기록에 능숙했고, 로마 행정 체계 하에서 일하면서 아람어, 헬라어, 라틴어에 모두 통달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구약 성경과 유대 전통에 깊은 조예가 있었으며, 예수님의 직접적인 목격자였습니다.
-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마태는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된 이방인 모두를 대상으로 하여 예수님을 구약의 약속을 성취하신 메시아로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특히 구약 인용문을 60회 이상 사용하여 예수님의 생애가 구약 예언의 성취임을 체계적으로 논증했고, 예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서 약속된 메시아임을 증명하면서도, 동시에 이방인들도 하나님 나라에 포함됨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또한 안디옥의 다문화적 환경에서 구약 예언의 성취라는 관점에서 복음의 보편성을 강조했고, 복음서에 다섯 개의 긴 설교를 포함시켜 예수님의 가르침을 새로운 율법으로 제시했습니다.